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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대중 전 대통령은

"살아오면서 5번의 죽을고비를 넘겼다."

라는 말을 종종 하셨다고 한다.

그런 의미에서 고인의 성함 앞에는 '인동초'란

수식어가 따라 붙는다고도 한다.

그래서 짤막하게나마 어떤 일들이 있었는지 자료를 찾아

정리해 보기로 했다.










첫번째 사건.

1950년 한국전쟁 당시 인민군에게 잡혀서 총살될 처지에 놓였는데

극적으로 탈출에 성공했다고 하는 이야기이다.

이에 대해서는 자료가 불충분하기 때문에 나도 자세히 알지는 못하겠다.






두번째 사건.

1971년 5월에 국회의원 선거 당시 서울지역 후보의 유세를 돕기위해 차량이동중

갑자기 김대중 전 대통령이 탄 차량으로 트럭한대가 돌진해서 큰 사고가 난 것이다.

이 사고로 뒤에서 달리던 택시가 함께 사고가 나, 세명이 그자리에서 즉사하고 

다른 세명은 중상을 입었다고 한다.

그리고 이 때의 교통사고의 후유증으로 인해 평생을 지팡이에 의존하며 살아가게 되었을 만큼

큰 사고였다고 한다.






세번째 사건.

이 사건이 세간에 잘 알려진 1973년 일본 도쿄의 팔레스호텔에서 일어난 피랍사건이다.

알려진 이야기에 의하면 팔레스 호텔 복도에서 중앙정보부원들에 의해 납치되어

호텔방 욕조에서 살해 당할뻔 했다고 전해진다.






네번째 사건.

네번째는 세번째사건과 이어지는 내용이다.

호텔방에서의 살해가 불가능해 지자 김대중 전 대통령을 마취시켜 차량에 태우고

바다로 옮겨 익사시키려 했으나, 실패로 돌아갔다는 내용.


세번째와 네번째에 관해서는 다음(daum)에 소개된 위키백과에서 내용을 조금 발췌해 보았다.

김대중 납치사건

이 부분의 본문은 김대중 납치사건입니다.
  • 1973년 8월 8일 오전 11시경 일본에 건너간 양일동 통일당 당수가 투숙하고 있던 도쿄의 그랜드 팔레스 호텔에 찾아가 양 당수와 김경인 의원을 만났다.[3] :38>
  • 1시 반경 호텔을 나서자 5명의 괴한이 그를 붙들어 건너편 객실로 끌고 갔다. 그 곳에서 마취를 당한 뒤 엘리베이터를 타고 호텔 주차장으로 내려갔다. 엘리베이터에는 두 사람의 일본인이 타고 있었는데 그가 "사람 살려! 나를 죽이려 한다"고 소리치자 그들은 3층에서 급히 내렸다.[3] :39
  • 괴한들은 그를 대기중인 승용차에 밀어넣고 머리를 좌석에 닿게 한 다음 눈과 입을 손으로 막았다. 차는 대여섯 시간 가량 달렸고 오사카 방향으로 추정된다. 처음 끌려간 곳은 아파트 비슷하였고 여자들의 말소리가 들렸다 한다. 그는 재갈이 물린 채 묶여 있었다. 다시 자동차로 해안까지 실려 갔다. 거기서 모터 보트에 실려 큰 배로 옮겨진 다음 바다로 나갔다. 팔과 다리는 뒤로 묶이고 발에는 무거운 돌이 달리고 눈에는 스카치 테이프를 붙인 위에 붕대가 감겨졌고, 상어밥이라는 말소리가 들렸다 한다. 그는 천주에게 마지막 기도를 올렸다. 갑자기 소음이 들리고 누군가 "비행기다" 하고 소리쳤다. 얼마 뒤 결박이 풀리며 그를 다루는 사람들의 태도가 다소 누그러졌다.
  • 8월 11일 초저녁 무렵 배는 한국의 어느 항구에 닿았는데 공업항으로 추정된다. 상륙하자 어느 초가로 옮겨졌다가 양옥으로 옮겨졌다. 의사의 진료도 받았다.[3] :39
  • 8월 13일 밤 10시 20분쯤 붕대로 눈이 가려진 채 승용차에 실려 집 근처에 내려다 놓였다. 괴한들은 반공단체인 구국동맹 행동대원이라고 자칭했다.[3] :39










다섯번째 사건.

1980년 신군부시절 일명 김대중 내란음모사건으로 인해 사형선고가 내려진 사건이다.

5.18 광주 민주화운동이 일어나기 전 날 정권전복을 꾀한 혐의로 체포되어 남산으로 끌려간다.

그리고 군법회의와 대법원을 거쳐 7가지의 죄명으로 사형이 선고된다.

하지만, 이 후 국내외의 구명운동으로 형은 무기징역으로 낮춰졌으며 미국으로 망명하며 위기를 넘겼다.


역시 이 사건과 그 후의 내용에 대해 짤막한 내용을 발췌해 보았다.


김대중 내란음모사건 이후

1980년 신군부시절, 김대중 내란음모사건으로 군사재판에서 사형을 선고받았다. 이후 세계 각국의 양심적 지식인들의 구명운동으로 1981년 1월 23일에 무기징역으로 감형되었다가, 1982년에 형집행이 정지되면서 미국으로 망명했다.[14] 김대중이 무기 징역으로 감형받는 데에는 교황의 역할이 컸다고 한다. 교황은 1980년 12월11일 서울 주재 교황청 대사관을 통해 전 전 대통령에게 1차 편지를 발송해 김 전 대통령의 선처를 당부했다. 김 전 대통령의 형량이 사형에서 무기징역으로 감형된 직후인 이듬해 2월14일 2차 편지를 보내 전 대통령에게 감사의 뜻을 전달했다.[15] 1983년에는 1월 31일에는 ‘뉴스위크’지 회견에서 한국 민주화와 인권 상황에 대한 입장 표명을 했고, 미국에서 유니언신학대 구제위원회 고문, 국제고문희생자구원위원회 고문과하버드대 국제문제연구소 객원연구원으로 활동하고,[16] 재미 한국인권문제연구소를 창설해 미주 지역에서 한국의 민주화에 관심을 기울이다, 1985년 2월 8일에 당국의 반대와 암살 걱정을 무릅쓰고 귀국하여 공항에서 격리되어 가택에 연금되었다. 1985년에는 김영삼과 함께 민주화추진협의회 공동의장에 취임했다. 1986년 신민당 상임고문으로 추대됐으나 당국에 의해서 취임이 저지되었다.[14]












겨울에도 그 잎이 시들지 않는다고 해서 이름붙여진 꽃 '인동초'(忍冬草)...

그 수식어답게 격동의 세월의 중심에서 꿋꿋하게 견뎌오신 김대중 전 대통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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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는 고통없는 곳에서 편히 쉬시기를 바랍니다.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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